참동계고이 의 편찬과 구조web.hallym.ac.kr/~taedong/nonmun/pdf/030_7.pdf · 201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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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 - 1. 서론 2. 참동계고이 편찬과 판본 1) 집필과 편찬 2) 참동계고이 판본 3. 참동계고이의 저본과 구조 1) 참동계고이의 저본 2) 참동계고이의 구조 4. 결론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이대승* 67) - 요약문 - 본 글은 주희의 참동계고이에 대한 연구이다. 본 글에서는 심도 있는 동계고이 연구를 위한 토대작업으로서 참동계고이의 집필시기와 편찬과 정, 참동계고이의 판본, 그리고 그 구조를 다루었다. 주희는 1186년(57세) 즈음부터 참동계에 이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채원정과 함께 1196년부터 집필 작업을 시작하여, 1197년 말엽과 1198년 초 엽 사이에 채원정의 아들 채연으로 하여금 1차 간행본을 출판케 한다. 그리고 주희는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1199년 봄에 정본을 간행한다. 주희 당시 간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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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2. 참동계고이 편찬과 판본 1) 집필과 편찬

    2) 참동계고이 판본3. 참동계고이의 저본과 구조 1) 참동계고이의 저본 2) 참동계고이의 구조4. 결론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이대승*67)

    - 요약문 -

    본 글은 주희의 참동계고이에 대한 연구이다. 본 글에서는 심도 있는 참동계고이 연구를 위한 토대작업으로서 참동계고이의 집필시기와 편찬과정, 참동계고이의 판본, 그리고 그 구조를 다루었다.

    주희는 1186년(57세) 즈음부터 참동계에 이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채원정과 함께 1196년부터 집필 작업을 시작하여, 1197년 말엽과 1198년 초

    엽 사이에 채원정의 아들 채연으로 하여금 1차 간행본을 출판케 한다. 그리고

    주희는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1199년 봄에 정본을 간행한다. 주희 당시 간행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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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 채연본은 현재 통행되지 않으며, 현행본은 원대 황서절이 편집한 것으로서

    경문과 주석의 문자에서 채연본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희의

    참동계고이는 팽효의 참동계분장통진의를 바탕으로 다른 참동계 판본들과의 비교·대조 작업을 거쳐 저술된 것으로, 그 구조는 다른 참동계 판본과 큰 틀에서 유사하다.

    주제어 : 주희, 참동계고이, 주역참동계, 팽효, 참동계분장통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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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주희(朱熹, 1130~1200)의 주역참동계고이(周易參同契考異)(이하 참동계고이)는 도교수양론의 주요 저작인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이하 참동계)에 대한 주해서로서, 자신의 생의 말엽에 학문적 벗이자 제자인 채원정(蔡元定, 1135~1198, 字 季通)과의 공동연구를 거쳐 완성된 저술이다. 참동계고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하나의 의문점을 떠올릴 수 있다. 남송 도학을 대표하는 주희는 무슨 이유로 도교연단서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나아가 주해까

    지 하였는가. 이는 주희 이후 많은 유학자들에게 고민을 안긴 문제인 동시에,

    현대의 참동계고이 연구에서 주로 다루어진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현대의 참동계고이의 대표적 연구로는 아즈마 쥬우지(吾妻重二), 친웨이

    강(欽偉剛) 그리고 김영식의 연구를 들 수 있다.1) 선행연구에서는 주희의 참동계 주해 특징과 관련하여, 주희가 역학방면에 관심을 두어 납갑법 등 상수역학 방면에서 상세히 기술하였고, 그가 참동계를 내단의 입장에서 이해하였지만 연단의 상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 수 없다[未詳其說]’는 태

    도를 견지하였음을 밝혔다. 그리고 주희의 참동계고이 저술 동기와 관련하여, ‘말년의 어려움으로 인한 양생법에 대한 관심(아즈마 쥬우지)’, ‘상수역학

    사상(아즈마 쥬우지) 혹은 선천역학사상(친웨이강)과의 연관성’ 그리고 ‘세계

    에 대한 폭넓은 관심(김영식)’ 등의 견해를 제시하였다.2)

    1) 吾妻重二, 「朱熹「周易参同契考異」について」(日本中国学会報, 第36集, 1984); 「周易参同契考異の考察」, (朱子學の新硏究, 東京:創文社, 2004) 284~291쪽; 欽偉剛, 朱熹與參同契文本(四川出版集團巴蜀書社, 2004); Yung Sik Kim, Monumenta Serica 55, 99~131쪽. “The Ts'an-t'ung-ch'i k'ao-i

    and the Place of Internal Alchemy (Nei-tan) in Chu Hsi's Thought,

    2007.”

    2) 아즈마 쥬우지(吾妻重二, 1987; 2004)는 제작경위, 제작이유, 주석특징과

    意義에 이르기까지 참동계고이에 대한 제반 사항을 서술하였다. 그는 주희의 참동계고이 저술 이유를 ‘쇠병으로부터 회복과 양생에 도움’과 ‘상수역학에 대한 관심’ 두 가지로 보는데, 주로 주희 말년의 상황과 관련하

    여 병의 회복을 위한 양생부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의 연구는 참동계고이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연구로서 큰 의의를 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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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다. 참고로 아즈마 쥬우지의 논문은 1984년 논문과 2004년 책에 실린

    논문이 있는데, 필자는 1984년 논문은 구하지 못하여 2004년 논문을 참

    고하였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2004년 책에 실린 논문은 1984년 논문과

    동일하거나 좀 더 보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친웨이강(欽偉剛)의 연구(2004)는 2013년 현재 유일한 참동계고이 박사학위논문이자 단행본으로서, 참동계고이의 서술배경과 기타 문헌자료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논리전개가 돋보인다. 그는 참동계고이 이전의 참동계 문헌 실태분석, 참동계고이의 저본 선택, 경문의 교정, 그리고 참동계고이 이후의 영향 등에 대해, 상세한 문헌자료와 엄밀한 고증을 통해 논리를 전개해 간다. 그는 주희가 자신이 제출한 ‘선천역학’의 참동계기원설을 위해 참동계고이의 경문을 다소 바꾸었으며, 주희가 제출한 ‘선천역학’ 해석은 이후 참동계 해석사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김영식의 연구(2007)는 주희의 참동계고이 서술 이유와 내단사상이 주희의 사상 속에서 지니는 위치를 다루고 있다. 그는 주희가 참동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위학의 난을 당하여 삶을 회피하거나 이단에 빠진 것

    이 아닌, 세계에 대한 깊고 넓은 주희의 관심 가운데 하나로 파악하면서,

    주희가 삶의 후반기에 내단사상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토픽을 아우르는 체

    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외 참동계고이의 국내연구로 김낙필, 신동원, 박지현 등의 연구가 있다. 이 중 김낙필의 연구는 주희가 저작한 參同契考異와 陰符經考異를 통해 그의 도교사상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였는데 이는 국내 고이연구의 효시가 된다. 신동원의 연구는 주희가 고이를 작성한 이유를 주로 다루면서, 주희가 참동계에서 ‘심(心)’의 역할을 중요시했으며, 이는 주희 자신의 통일된 사상체계 내에 주역참동계를 위치지은 것이라는 관점을 피력하였다. 박지현의 연구는 참동계 일반사항과 문헌사항 그리고 참동계고이의 문헌사항과 참동계에 대한 주희의 입장을 다루었다. 세 연구는 그 내용이 다소 간략하지만 국내 연구 실정에 비추어 볼 때, 참동계고이 연구를 위한 밑거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김낙필, 「朱熹의 道敎認識」, 泰東古典硏究 제10집, 翰林大學校 泰東古典硏究所, 1993; 신동원, 「주희와 연단술 -周易參同契考異의 내용과 성격」, 한국의사학회지 Vol.14 No.2, 韓國醫史學會, 1999; 박지현, 「周易參同契考異 小考」, 藏書閣 6호, 정신문화연구원, 2001.

    국외 연구로는 柳存仁, 蘇敏, 徐炳興, 李新 등이 있다. 柳存仁의 연구는

    참동계와 관련된 사항과 주희의 주석에 대해 논설하면서 상수역학 방면에서 주희의 주석을 풀이하고 있다. 蘇敏, 徐炳興는 주희의 철학사상에 대

    한 도교 우주론의 영향에 대해 다루며, 李新은 고이의 음양관점에 대해 각각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柳存仁, 「朱熹與參同契」, 國際朱子學會議論文集 下冊, 臺北中央硏究院中國文哲硏究所, 1993; 蘇敏·徐炳興, 「朱熹與周易參同契考異」, 江西社會科學, 上饒師範學院朱子學研究所, 2005; 李新, 「論朱熹周易參同契考異的陰陽觀」, 濟寧師範專科學校學報 第28卷 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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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희는 말년에 위학시비와 건강악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그러한 어

    려움을 타파하기 위해 도교양생법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송대 도학의 대표자로서의 인식을 지니고 있었던 주희가,3) 말년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양생을 위해 도교의 연단 문헌을 탐구하고 더 나아

    가 주해까지 달아 출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자신의 사유의 확장

    혹은 역학과의 관련성 때문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나아가 주희가

    생애 후반기 선천역학에 천착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참동계고이의 서술은 역학사상과의 관련성 특히 선천역학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참동계고이는 그간 주희의 사유체계와는 큰 연관성이 없는 저술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참동계고이가 주희의 선천역학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관점을 수용할 경우, 그동안 참동계고이를 주희의 사유체계와 별개의 문헌으로 보는 관점은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러한 재검토를 위해서는, 참동계고이의 집필과 편찬과정, 참동계고이와 타 참동계 주석판본과의 구조 비교, 참동계고이의 경문과 주석 분석, 주자어류 등 주희의 글에 실린 참동계 관련 내용 등에 대한 세밀한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참동계고이 특징에 대한 종합적 해석이 필요하다.

    필자는 주희의 참동계고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주희의 사유체계와 참동계고이의 연관성을 세밀히 연구하기 위한 토대작업으로서 본 글에서 참동계고이 연구의 기초사항을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문헌의 집필과정과 편찬, 참동계고이의 판본, 그리고 참동계고이의 구조 등을 정리한다.

    2期, 2007. 이외에 束景南, 朱熹年譜長編(上下)(華東師范大學出版社, 2001)에서는 주자학의 전체 틀 속에서 주희의 말년의 주된 사유로서 참동계고이를 다루고 있다.

    3) 주희는 생애 전반에 걸쳐 장식, 여조겸, 진량, 육구연 등 남송 도학공동체

    의 주요 인물들과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사유체계를 발전시켜

    갔다. 그리고 그러한 남송 도학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주희는 생애 후반

    기에 자신이 북송 도학의 정통을 계승한 도학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지니

    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호이트 틸만 저, 김병환 역, 주희의 사유세계: 주자학의 패권(교육과학사,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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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참동계고이 편찬과 판본

    이 장에서는 참동계고이의 집필과 편찬과정, 그리고 참동계고이의 판본사항을 다룬다.4)

    1) 집필과 편찬

    주희의 참동계고이는 언제부터 집필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그 결과물은 언제 간행되었는가. 참동계고이의 초고 집필에 대해 선행연구에서는 1186년과 1196년이라는 두 설이 제시되었으며, 참동계고이의 1차 간행시기에 대해서는 1197년, 1198년, 1197년과 1198년 사이라는 설이 제시되었다. 이

    하에서는 회암집(晦庵集)에 나타난 참동계고이 관련 자료를 통해, 기존 연구에 나타난 논란을 짚어보면서, 참동계고이 집필·편찬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한다.

    (1) 참동계고이 草稿

    아래로 운기(運氣)·참동(參同)·태일(太一) 등의 부류에 이르기까지 비록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또한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자연(自然)

    의 리(理)이기 때문이다.5)

    4) 참동계고이 저술과정과 관련한 사항은 아즈마 쥬우지와 친웨이강 그리고 슈징난(束景南) 등에 의해 일부 다루어 졌으며, 참동계고이의 판본사항은 朱子全書 第13冊(上海古籍出版社, 安徽敎育出版社, 2002), 참동계고이 해제에 일정부분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선행연구와 주희연보를 살펴보면, 참동계고이 저술과 편찬시기에 있어 일부 차이가 보인다. 이에 필자는 선행연구 외에 슈징난의 朱熹年譜長編(上下)(華東師范大學出版社, 2001), 그리고 첸라이(陳來)의 朱子書信編年考證(增訂本)(三聯出版社, 2007) 등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이하에서 참동계고이 집필과 편찬, 그리고 판본사항을 기술한다.

    5) 易學啓蒙, 「本圖書第一」, “下至運氣參同太一之屬, 雖不足道, 然亦無不相通, 蓋自然之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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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희의 역학계몽「본도서제일(本圖書第一)」에는 「하도」와 「낙서」로 말미암아 복희가 역을 만들었고 우임금과 기자가 「홍범」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6) 위 인용문은 이 내용에 대해 「하도」, 「낙서」가 복희의 역이나 우임금과 기자의 「홍범」 뿐만 아니라, 오운육기(五運六氣)와 참동계 등까지도 관련된다는 채원정의 말을 주희가 주석으로 실어 놓은 것이다. 역학계몽이 채원정과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진 것 등을 고려해 볼 때, 주석 내용이 비록

    채원정의 말이긴 하지만, 동시에 주희의 견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

    에 우리는 역학계몽이 완성된 1186년(57세) 즈음에, 주희가 이미 참동계를 알고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더불어 참동계가 「하도」, 「낙서」와 연관된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7)

    역학계몽 저술 시기에 이미 참동계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었던 주희는 과연 언제 참동계고이 초고를 집필하였을까.

    참동계 두 책과 종유(鍾乳) 한 두 개를 보냅니다. 고이는 제가 어찌 그 시비를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문장의 뜻과 음독 사이에 헤아

    려봐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8)

    참동계에는 여전히 오자가 많으니 서둘러 고이를 지어 보여 주십시오. 납갑설(納甲說)에서 준괘(屯卦)와 몽괘(蒙卦)가 모두 상하 괘의 초효

    를 사용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9)

    위 첫 번째 인용문은 회암집 권44, 「답채계통」에 나오는 글로서, 주희가 채원정에게 자신이 참동계고이 내용과 관련한 시비는 결정하기는 어렵고 6) 위의 책, “蓋圓者, 河圖之數. 方者, 洛書之文. 故羲文因之而造易, 禹箕叙之

    而作範也.”

    7) 참동계와 「하도」, 「낙서」가 상통할 수 있다는 관점과 관련하여 친웨이강, 앞의 글, 10쪽(주석 2)과 33~34쪽 참조.

    8) 晦庵集 卷四十四, 「答蔡季通」, “參同二冊鍾乳一兩納上. 考異熹安能決其是非? 但恐文義音讀間有可商量處耳.”

    9) 晦庵集, 續集 卷2, 「答蔡季通」, “參同契尙多誤字, 可早作考異示及. 納甲之說, 屯蒙皆用上下卦初爻, 何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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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문장의 뜻과 음독 등과 관련하여 좀 더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두 번째 인용문은 회암집의 속집 권2, 「답채계통」에 나오는 글로서, 주희가 채원정에게 기존 참동계 판본의 경문 오자(誤字)를 교정하여 서둘러 참동계고이를 완성해 보이길 촉구하는 동시에, 참동계 경문에 서술된 월체납갑법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두 인용문은 우리에게 참동계고이와 관련된 두 가지 사항을 알려준다. 하나는 저자와 관련된 사항이다. 두 인용문에서 주희는 채원정에게 참동계고이와 관련된 내용을 질의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그가 저술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논평자의 입장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참동계고이의 초고 작업은 주희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채원정에 의해 시작된 것처

    럼 보인다. 참동계고이 저술의 시작에 대해 언급된 내용은 이외에는 나타나 있지 않기에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위 편지글을 통해 우리는 참동계고이 작업이 채원정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참동계고이 집필 시기와 관련된 사항이다. 참동계고이 초고 집필시기와 관련하여 선행연구에서는 1186년과 1196년 두 가지 설이 제

    시되고 있는데, 이는 위 인용문의 연대고증과 관련된다. 첸라이(陳來)의 주희

    의 서간문 고증과 슈징난(束景南)의 주희 연보에서는, 위의 두 번째 인용문에

    대해 모두 1196년에 작성된 편지글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제시한다.10) 그런

    데 첫 번째 인용문에 대해서는 1186년과 1196년 두 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

    어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는데, 바로 이 첫 번째 인용문의 작성 시기를 언제

    로 보느냐에 따라 참동계고이의 초고 집필시기가 달라진다.참동계고이 초고 집필을 1186년으로 보는 설은 아즈마 쥬우지의 설로서

    이는 역학계몽과 관련된다. 첫 번째 인용문 앞부분에는 주희가 채원정에게 역학계몽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묻는 내용이 나오는데,11) 여기서 첸라이

    10) 陳來, 앞의 책, 425~426쪽; 束景南, 앞의 책(朱熹年譜長編(上下)), 1147~1149쪽

    11) 晦庵集 卷44, 「答蔡季通」, “啓蒙近又推得初揲之餘不五則九, 其數皆奇, 而其爲數之實, 五三而九一之, 應圍三徑一之數. 第二三揲之餘不四則八, 其數

    皆偶, 而其爲數之實 四八皆二, 亦應圍四用半之數. 是三揲之次, 亦已自有奇

    偶之分. 若第二三揲不掛, 則不復有此差別矣. 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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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陳來)는 역학계몽의 간행시기가 1186년이기에 이 편지글이 1186년 즈음에 작성되었다고 고증한다.12) 이같이 역학계몽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아즈마 쥬우지는 참동계고이의 첫 작업은 채원정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1186년 무렵에 채원정과 주희 양자 사이에서 참동계고이 집필이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다.13)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주희와 채원정의 역학계몽 내용에 대한 논의가 역학계몽 작성된 후에도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맹점과, 첫 번째 인용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참동계고이 관련 서간문이 1196년 즈음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반면 1196년으로 보는 설은 슈징난의 설로, 그는 두 인용문이 1195~1196

    년에 이루어진 채원정과 주희의 ‘경식(磬式)’·‘석경(石磬)’ 논의와 관련된다고

    본다.14) 하지만 첫 번째 인용문과 관련된 편지글에는 ‘경식’이나 ‘석경’과 관

    련된 논의가 없어, 이를 근거로 삼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오히려 1196년

    설로 볼 수 있는 다른 근거로서 필자는 성경(星經)과의 연관성을 들 수 있다고 본다. 인용문의 편지글에서는 성경에 대한 사항을 주희가 채원정에게 묻고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15) 인용문 외에 성경과 참동계가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편지글이 1196년에 쓰인 것이기에,16) 1196년에 주희와 채원정

    12) 陳來, 앞의 책, 250쪽 참조.

    13) 吾妻重二, 앞의 글(2004), 285~287쪽.

    14) 束景南, 앞의 책(朱熹年譜長編(上下)), 1147~1149쪽; 束景南, 朱子大傳(福建敎育出版社, 2000), 1001쪽 참조.

    15) 晦庵集 卷44, 「答蔡季通」, “星經紫垣固所當先, 太微、天市乃在二十八舍之中, 若列於前, 不知如何指其所在? 恐當云在紫垣之旁, 某星至某星之外, 起

    某宿幾度, 盡某宿幾度. 又記其帝坐處須云在某宿幾度, 距紫垣幾度, 赤道幾度,

    距垣四面各幾度, 與垣外某星相直. 及記其昏見及昏旦夜半當中之星. 其垣四面

    之星, 亦須注與垣外某星相直, 乃可易曉, 不知盛意如何也? 參同二冊·鍾乳一

    兩納上. 考異熹安能決其是非? 但恐文義音讀間有可商量處耳.”

    16) 위 두 번째 편지글 다음의 서간에서 “星經參同甚願早見之, 只恐竄謫不得

    共講評耳.”라며 星經과 참동계가 함께 나오며, 이 편지글은 1196년에 쓰였다고 본다.(첸라이, 앞의 책, 425~426쪽) 슈징난은 星經과 참동계로 시기관계를 고증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주희가 참동계고이를 집필할 무렵에 참동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성경을 봤다고 파악하고 있다.(束景南, 2000, 朱子大傳, 福建敎育出版社, 1006쪽) 참고로 첸라이는 성경과 참동계가 동시에 나오는 편지글 간에 연관성을 두지는 않는다. 그는 인용문의 글은 1186년에 쓰였다고 보는 반면, “星經參同甚願早見之, 只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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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경과 참동계에 대해 몇 차례 논의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위의 두 인용문이 참동계고이의 교정이라는 측면에서 내용상 연결되고 있다는 점 역시, 두 인용문이 모두 참동계고이의 교정과 관련하여 주희와 채원정이 동시대에 주고받은 서간문이라는 데 힘을 실어준다.

    위의 서간문 외에 주희는 1196년에 채원정에게 “참동계는 한 번 필사하면서 점점 명확해지니, 온전히 끝나기를 기다려 보내 드리겠습니다. 번거롭더

    라도 한 번 보시고 나서 간행하십시오.”17)라는 편지를 보낸다. 여기서 주희는

    채원정에게 참동계고이를 한 번 더 살펴보고 난 연후에 간행하라고 말하고 있고 있어, 이 시기에 참동계고이 초고의 형태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2) 참동계고이의 편찬과정

    참동계고이의 수정작업은 경원(慶元) 3년(1197, 68세)에도 계속 이루어진다. 1197년 초에 채원정이 위학(僞學)의 금(禁)으로 인해 도주(道州)로 귀양

    가게 되자, 주희는 정안사(浄安寺)에서 채원정과 전별하면서 참동계에 대해 평소 의심 가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토의한다.18) 채원정과 전별 후 주희는 참동계 내용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하게 되는데, 그는 이 때 참동계 내용 가운데 채원정과 의론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한다.19)

    주희와 채원정의 전별 이후 참동계고이 수정작업에 채원정의 장자 채연

    竄謫不得共講評耳.”은 1196년에 쓰였다고 본다.

    17) 晦庵集, 續集 卷2, 「答蔡季通」, “參同寫得一本稍分明, 俟皆了納去, 更煩一看, 便可刊刻矣.”

    18) 朱子語類 卷107, 「丙辰後」, “先生徃浄安寺候蔡, 蔡自府乘舟就貶, 過浄安, 先生出寺門接之. 坐方丈寒暄外, 無嗟勞語. 以連日所讀參同契所疑扣蔡,

    蔡應答洒然.”

    19) 晦庵集 卷44, 「答蔡季通」, “參同之說子細推尋, 見得一息之間便有晦朔弦望. 上弦者, 氣之方息, 自上而下也. 下弦者, 氣之方消, 自下而上也. 望者, 氣

    之盈也, 日沈于下而月圓于上也. 晦朔之間者, 日月之合乎上, 所謂‘擧水以滅

    火, 金來歸性初’之類是也. 眼中見得了了如此, 但無下手處耳. 自從別後, 此等

    事更無商量處, 劇令人憒憒. 今此病中, 又百事不敢思量, 未知異時賢者之歸,

    得復相見論此否耳.”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 177 -

    (蔡淵, 1156~1236)이 참여하게 된다.

    참동계고이는 이제 막 필사를 마쳤는데 또 다시 살필 겨를이 없어 지금 수붕(壽朋)에게 주어 보냅니다. 더불어 이곳에서 필사한 한 책, 원본

    (袁本) 한 책, 제본(濟本) 두 책도 보내니, 번거롭지만 하나하나 대조하여

    고쳐야할 곳이 있으면 모두 (첨지를) 붙여 자세히 비교하여 보내 주십시

    오. 다시 수정한 바를 봐야 백지에 필사하여 간행할 수 있습니다. 구본(丘

    本)은 매우 좋지 못하여, 오상류(五相類)의 편수는 도리어 네 글자를 삭제해야 비로소 읽을 수 있고, 한 글자를 고쳐야 비로소 운이 맞으나, 또한

    (아주) 도움됨이 없지는 않으니 살펴 점검해 보십시오. 이 때문에 독서는

    넓고 꼼꼼히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20)

    위 인용문은 주희가 참동계고이 교정을 위해 참동계의 여러 판본들을 채연에게 보내면서 말한 편지글의 내용으로, 이 글에서 우리는 참동계고이수정과 관련한 주희와 채연의 공동작업을 생동감 있게 볼 수 있다. 주희는 참동계고이가 막 필사를 마쳤지만, 자신이 최근에 본 원추본 등의 판본을 좀 더 참고해서 참동계고이의 경문을 교정해 달라고 채연에게 말하고 있다. 이같이 주희는 채연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참동계 본문의 내용과 글자 교감, 그리고 자신이 고친 사항 등을 지적하면서 참동계고이 수정작업을 지속한다.21) 참동계고이는 1197년의 주희와 채연, 그리고 채원정 삼자의 공동작업을 거친 후,22) 마침내 1197년 말엽과 1198년 초엽 사이에 간행된다.

    20) 晦庵集, 續集 卷3, 「答蔡伯靜」, “參同契考異方寫得了, 亦未暇再看過, 今附壽朋納去. 幷此中寫本一冊、袁本一冊、濟本二冊, 煩逐一對過, 有合改

    處, 並貼出, 子細批注寄來. 容再看修定, 方可寫白刊行. 丘本不甚佳, 然五相

    類篇首却得刪了四字遂可讀, 改得一字遂叶韻, 亦不爲無助, 可試檢看. 以此知

    讀書不可不博考也.”

    21) 주희와 채연의 공동작업을 보여주는 서간문은 위 인용문 전후에 나타나

    있다. 앞의 책, “參同定本納去, 可便寫白, 并元本寄來, 更看一過, 然後刻本乃佳. 簽貼處巳改補矣, 一兩處無利害, 又灼然是錯誤, 即不湏改也. 玄溝害氣, 恐未是說人身内事, 方是設譬之詞, 緩讀可見也. 肝、肺、腎是三物, 脾是戊己, 無可疑者. 定本亦已添入矣. 渾象之說, 古人巳慮及此, 但不說如何運轉. 今當

    作一小者, 粗見其形製, 但難得車匠耳.”; “參同考異今以附納, 其間合改定處

    各巳摽注其上矣. 鼎器歌中‘七聚’, ‘聚’一作‘竅’, 恐合改竅爲正, 而以聚爲一作,

    不知如何? 可更審之. 若改, 即正文此句亦合改也.”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 178 -

    참동계는 일가(一哥)가 이미 착수하여 간행했는데, 보면 볼수록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23)

    위백양의 책은 일가(一哥)가 이미 간행하여 일전에 보내왔으니 이는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간행본은) 교감한 것이 매우 정밀하고 문자의 뜻과

    음운이 모두 자못 근거한 바가 있기에 세속에서 전해지는 책들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다만 「교외별전(敎外別傳)」 한 구절이 부족할 뿐입니다.24)

    위 두 인용문은 참동계고이 간행시기를 알려주는 동시대에 쓰인 편지글로서 이 두 서간문이 어느 시기에 쓰였는가에 따라 참동계고이의 간행시기가 결정된다. 우리는 두 번째 서간문에 기록된 “오백풍(吳伯豐)의 죽음”을 통해 두 서간문이 쓰인 대략의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25) 그 명확한 시점을

    확정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선행연구에서는 위 서간문의 작성 시기를 1197년

    (아즈마 쥬우지, 주자전서 부록의 연보), 1198년 봄(첸라이, 슈징난), 1197년에서 1198년 사이(친웨이강) 등으로 파악한다. 필자의 경우, 서간문에 명확

    한 일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언제라고 단언하기 어려우므로, 친웨이강의 견

    해와 유사하게 1197년 말엽과 1198년 초엽 사이로 파악한다.

    참동계고이를 간행한 이후 주희는 참동계의 책수(策數)의 법을 얻는다. 이에 그는 「참동계설(參同契說)」을 작성하고 이를 채원정에게 보여 함께 강론

    22) 주희는 채원정에게 여러 날 참동계를 읽으면서 재미를 맛보았다고 말하며, 「卦氣消息」 한 책을 채연을 통해 보여주길 요청하기도 한다. 晦庵集 卷44, 「答蔡季通」, “熹連日讀參同, 頗有趣, 知‘千周萬遍’非虛言也. 但恨前此不得面扣耳. 向見爲抄一冊卦氣消息者, 不知了未? 幸語一哥, 取以見予

    也.”

    23) 晦庵集, 續集 卷2, 「答蔡季通」, “參同契一哥巳下手刻版矣, 轉看轉曉不得.”

    24) 晦庵集, 續集 卷2, 「答蔡季通」, “魏書一哥巳刻就, 前日寄來, 此必寄去矣. 校得頗精, 字義音韻皆頗有據依, 遠勝世俗傳本. 只欠‘敎外別傳’一句耳.”

    25) 두 번째 서간문에는 “吳伯豐在後生中最爲警敏, 肯着實用功, 近年說得儘有條理, 乃不幸而蚤死.”라는 기록이 있는데, 오백풍이 1197년 말엽에 사망했

    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서간문이 1197년 말엽이나 1198년 초 즈음에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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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자 하였지만, 편지가 닿기 전에 채원정이 사망(1198년 8월 9일)한다.26)

    이후 주희는 참동계고이 정경(正經)을 판각하기 위해 참동계고이 재수정 작업에 들어간다.27) 이 시기에 그는, 증경건(曾景建)으로부터 얻은 참동계구본(舊本)을 채연에게 보내 경문을 교감토록 하여 새 판본의 뒤로 넣는 작업

    을 시키기도 하고,28) 유덕수(劉德脩)에게 새로 간행할 참동계고이를 보내주기도 한다.29) 그리고 마침내 1199년 봄에 참동계고이 수정본을 완성하여 건양에서 간행하는데, 이 재차 수정본이 바로 참동계고이 정본(定本)이 된다.30)

    2) 참동계고이 판본

    현재 통행하는 참동계고이 판본들을 살펴보면 각 판본마다 글자와 형식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중 형식에 있어 주된 차이는 크게 두 가지

    로서, 하나는 ‘고이(考異)’라는 명칭의 유무이고, 다른 하나는 권수가 1권인가

    3권인가의 문제이다. 가령 명칭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참동계고이의 저본으로 이용되는 정통도장(正統道藏)본은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注)라고 되어 있는 반면, 사고전서본은 주역참동계고이로 되어 있다. 권수와 간련하여, 정통도장본은 3권 3편 체제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은 1권 3편 체제로 되어 있다. 이같이 현행본에 보이는 명칭과 권수에 따른 차이는 과연

    언제 이루어졌을까. 그리고 이러한 어떤 형태가 채연에 의해 간행된 참동계고이와 동일한 것일까.26) 晦庵集 卷67, 「參同契說」, “此說欲與季通講之, 未及寫寄而季通死矣. 偶

    閱舊稿, 爲之泫然. 戊午臘月一十六日.”

    27) 晦庵集, 續集 卷3, 「答蔡伯靜」, “考異俟更子細看, 且令刻正經, 此更一兩日納去未晩也.”

    28) 晦庵集 卷61, 「答曾景建」, “參同舊本深荷錄示, 已令薺伯靜點對, 附刻新本之後矣. 但龍虎經却是取法參同, 亦有不曉其本語而妄爲模放處. 如論乾坤二

    用周流六虛處, 可見疏脫, 試考之可見也.”

    29) 晦庵集, 續集 卷4, 「答劉德脩」, “參同契絶無善本, 近校得一通, 令人刊行方就, 尙有紕謬處. 今納一冊, 或因書煩爲扣之, 渠必於此深有得. 恐其有錯

    誤, 得筆示幸甚也.”

    30) 束景南, 앞의 책(朱熹年譜長編(上下)), 1360쪽.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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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연에 의해 간행된 참동계고이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채연 판본 이후 참동계고이 판본 중 가장 이른 것은 주자성서(朱子成書)본으로 알려져 있다. 주자성서본은 원나라 강서성(江西城) 안복인(安福人) 황서절(黃瑞節)이 지정(至正) 원년(元年)(1341)에 일신서당(日新書堂)에서 간행한 것으로

    서 ‘고이’ 두 글자는 없는 1권 체재이다. 이 참동계고이 판본에는 주희의 주석 외에 황서절 자신의 부록이 덧붙여 실려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모든 판본

    은 모두 이 판본을 따르고 있다.31) 참동계고이 현행본의 가장 이른 형태가 원대 판본이기에, 우리는 남송시기 채연에 의해 판각된 간행본의 원래 상태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현재 통행본과 채연본 사이에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몇몇 자료를 고찰할 때 두 판본 사이에는 몇 가지 문자 상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주희가 참동계고이와 관련하여 채연과 주고받은 서신 가운데에는 글자 교감사항이 나오는데, 이는 현재 통행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32) 더불어 송말·원초대의 도사 유염이 참동계를 교감하면서 작성한 주역참동계석의(周易參同契釋疑)에는 참동계고이를 인용하여 경문을 교감한 사례가 나오는데, 이러한 내용 역시 현행 참동계고이에 보이지 않거나 혹은 그 내용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33)

    31) 朱子全書 第13冊(上海古籍出版社, 安徽敎育出版社, 2002), 523쪽.32) 채연에게 보낸 편지 중에는 “五相類篇首却得刪了四字遂可讀, 改得一字遂

    叶韻, 亦不爲無助, 可試檢看. 以此知讀書不可不愽考也.”, “鼎器歌中‘七聚’, ‘聚’一作‘竅’, 恐合改‘竅’爲正, 而以聚爲一作, 不知如何? 可更審之. 若改, 即

    正文此句亦合改也.”(朱文公文集續集卷3, 答蔡伯靜)의 내용이 나온다. 서간의 내용과 함께 참동계고이를 살펴보면 , 팽효본 「五相類」에 있는 “泛濫而說”의 4글자는 참동계고이에서는 삭제하였고, 「鼎器歌」에 있는 “兩七聚, 補翼人”의 ‘聚’는 ‘竅’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참동계고이 주석 내용에서는 이에 대해 별다른 말이 없다.

    33)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주역참동계석의에서 유염은 “鄞鄂, 朱子參同契考異作根那, 那即專也.”라 하였으나, 현행본 참동계고이에는 ‘鄞鄂’으로 되어 있다. “復卦建始初, 或疑與關雌建始初重複, 遂改初爲萌. 朱子謂此乃不謂古韻者妄改之也.”라고 주희가 말했다고 하는데, 현행본 주석에는

    “此乃不謂古韻者妄改之也” 구절이 없다. “仰俯, 他本皆作俯仰. 朱子謂, 當

    作仰俯, 乃叶韻, 今從之.”의 ‘仰俯’는 현행본에는 ‘俯仰’으로 되어 있다. “若

    飴, 舊本飴作鉛, 朱子本改正作飴.”라고 되어 있으나, 현행본에는 ‘若鉛’로

    되어 있다. “朱子謂, 今按二句自屬下文俱相貪併之下, 四句相承, 語意連屬,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 181 -

    그렇다면 ‘고이’라는 명칭의 유무와 권수 문제는 과연 언제부터 발생되었으

    며, 본래 참동계고이은 어떤 형태였을까. ‘고이’라는 명칭의 유무는 송·원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남송 직재(直齋)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와 송사(宋史)「예문지(藝文志)」에서 주희의 참동계고이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직재서록해제에는 ‘고이’라는 명칭이 보이지만,34) 송사「예문지」에는 ‘고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35) 때문에 우리는 송원 시기에 ‘고이’ 명칭의 유무와 관련된 문제가 시작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주희가 서신 속에서 ‘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

    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주희의 참동계 주석본의 명칭에는 ‘고이’를 붙이는 것이 좀 더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권수의 차이는 직재서록해제와 송사「예문지」의 기록에 모두 1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본래는 1권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원대 황서절의 주자성서본 이후 명대부터 청대까지의 주요 판본 사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명나라 때 간행된 참동계고이 판본으로 우리는 영종(英宗), 정통(正統) 10년(1445)에 간행된 정통도장본을 들 수 있는데, 이 정통도장본에서부터 권수가 상·중·하 3권 3편 체제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정통도장본의 명칭은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注)’이며, 주자성서본과는 권수만 다를 뿐 문자는 거의 같다. 청나라 시기 주요 판본으로는 주자유서이각(朱子遺書二刻)본, 사고전서(四庫全書)본, 수산각총서(守山閣叢書)본, 분흔각총서(紛欣閣叢書)본 등이 있다.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의 주자유서이각본은 1권으로 ‘고이’ 두 글자가 있고, 건륭(乾隆) 연간의 사고전서본 역시 1권으로 ‘고이’ 두 글자가 있다. 이후 사고전서본을 원본으로 도광(道光) 연간의 수산각총서본이 만들어졌고, 수산각총서본에 의거하여 이 후 총서집성(叢書集成)본과 사부비요(四部備要)본이 만들어졌다. 청 도광 연간의 분흔각총서본은 정통도장본을 따라서 3권으로 나뉘어 있고,

    不當在此.”라 하였으나, 현행본 주석에는 이러한 주희의 말이 없다.

    34) 直齋書錄解題 卷12, 「神仙類」, “參同契考異一卷. 朱熹撰, 以其詞韻皆古, 奥雅難通, 讀者淺聞, 妄輙更改, 比他書尤多舛誤, 合諸本更相讎正, 其諸同異, 皆並存之.”

    35) 宋史, 「藝文志·四子類道家類」, “朱熹周易參同契一卷.”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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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 두 글자가 실려 있다.36)

    이외 조선의 참동계고이 판본을 살펴보면, 참동계고이는 현종 14년(강희 12년, 1673)과 숙종 38년(강희 51년, 1712)에 간행된 남구만본(南九萬本)

    이 조선 시기에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 남구만본은 주자성서본과 마찬가지로 ‘고이’ 두 글자가 없고 1권으로 되어 있다.37)

    3. 참동계고이의 저본과 구조

    이 장에서는 참동계고이의 구조적 특징을 살핀다. 이를 위해서는 참동계고이의 저본이 된 판본과의 비교가 필요하기에, 먼저 참동계고이의 저본이 된 참동계 문헌이 살피고, 이 문헌과 참동계고이의 구조를 비교한다.

    1) 참동계고이의 저본

    주희의 참동계고이의 저본을 살피기 위해서는 남송시기에 전해지던 참동계 간행본 혹은 주석본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고찰하고, 그 중 주희가 어떤 문헌을 선택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참동계 문헌과 관련하여 다음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참동계 주석본은 모두 19부 31권이다. 그 서목은 협제 정초의 「예문략」에 있으며, 팽효본이 최근까지 전해진다.38) (참동계고이, 머리말)

    36) 명대부터 청대까지의 판본사항은 朱子全書에 실린 伍偉民의 참동계고이 해제 부분을 참고하였다. 여기서 伍偉民은 “책의 이름에 ‘고이’ 두 글자가 없는 것은 「讚序」가 正文 뒤에 있고, ‘고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讚序」가 모든 책머리에 있으며, 황서절이 부록에서 주희의 후서라고 서술하였으므로 정문의 마지막에 두는 것이 옳다”(525쪽)고 하고 있으나, ‘고이’

    명칭이 있는 사고전서본은 「찬서」가 正文 뒷부분에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37) 조선의 참동계고이 남구만본과 관련하여 이대승, 「주역참동계고이 남구만본과 「참동계토주」 연구」, 장서각 27(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참조.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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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초의 통지「예문략」에서 처음으로 참동계를 하나의 학파로 별도로 세우고, 주석본 19부 31권을 기재하였다. 지금은 대부분 유실되었으

    며, 오직 팽효본 1권만이 전해진다.39) (사고전서, 분장통진의「사고제요」)

    위 첫 번째 인용문은 원대 황서절이 참동계고이 머리말에 남긴 글이며, 두 번째 인용문은 사고전서 편찬자가 분장통진의「사고제요(四庫提要)」에 남긴 글이다. 정초(鄭樵, 1104∼62)가 1161년 전후로 완성한 통지(通志)「예문략(藝文略)」에는 총19부 31권의 참동계 서목이 실려 있는데,40) 두 인용문으로부터 정초의 「예문략」에 실린 참동계 서목이 바로 처음으로 참동계 문헌을 별도로 정리하여 기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41) 더불어 원대에 이미 「예문략」에 나타난 여러 참동계 서적 가운데 팽효의 참동계만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수 있다.

    위 두 인용문에 따르면, 참동계의 나머지 판본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현재 알 수 없으며, 주희 이전의 참동계 관련문헌은 팽효본을 제외하고는 대

    38) 周易參同契考異, “參同契註本, 凡一十九部, 三十一卷. 其目載夾漈鄭氏「藝文略」. 彭曉本最傳.”

    39) 四庫全書, 周易參同契分章通眞義·提要, “鄭樵通志「藝文略」, 始別立參同契一門, 載注本一十九部三十一卷. 今亦多佚亡, 獨曉此本尙傳.”

    40) 通志 卷六十七, 「藝文略」, “周易參同契三卷(漢魏伯陽撰, 抱素子注), 又五卷(翟直躬注). 陰陽統畧周易參同契三卷(徐從事注). 陰眞君周易參同契三卷. 參同契合金丹行狀十六變通眞訣一卷. 參同契太易志圖一卷(張處撰), 又一卷(重元子撰). 參同契太易二十四氣修煉太丹圖一卷. 參同契太易丹書一卷. 參同契手鑑圖一卷. 參同契明鑑訣一卷(彭曉撰). 參同契金碧潛通訣一卷. 周易參同契分章通眞義三卷. 參同契還丹火訣一卷. 參同太丹次序火數一卷. 參同契特行丹一卷. 參同契五相類一卷(漢魏伯陽撰). 金碧五相類參同契一卷(陰眞君撰). 參同金石至藥論一卷. 右參同契(一十九部三十一卷)”

    41) 친웨이강에 따르면, 「예문략」에 실린 참동계 문헌들은 현재 통행되는 참동계 외에, 당송 도교연단문헌들이 ‘참동계’라는 이름으로 함께 혼용된 채 실려 있는 것이다. 이는 주희 이전의 남송시기 참동계 문헌이 일정한 定本 없이 도교 연단문헌들과 함께 ‘참동계’란 명칭으로 혼용되어 유통되

    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欽偉剛, 앞의 책(朱熹與參同契文本), 1~31쪽 참조.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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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분 일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명대 간행된 정통도장, 태현부(太玄部)에는 팽효본 외에 당대(唐代)의 참동계 문헌이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참동계 관련 문헌 사항을 살피기 위해, 정통도장(正統道藏), 태현부에 실린 참동계 문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정통도장, 태현부에 실린 참동계 관련 저작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 長生陰眞人註, 周易參同契 3卷 (이하 음장생본) · 無名氏注(映字號), 周易參同契注 3卷 (이하 무명씨(영)본) · 黃瑞節附錄, 周易參同契 3卷 (주희의 참동계고이) · 彭曉註, 周易參同契分章通眞義 3卷, 周易參同契鼎器歌明鏡圖 1卷  

       (이하 두 문헌을 통칭할 때는 팽효본, 각각은 분장통진의, 정기가명     경도)

     · 無名氏註(容字號), 周易參同契註 2卷 (이하 무명씨(용)본) · 兪琰述, 周易參同契發揮 9卷, 周易參同契釋疑 3卷 (이하 두 문헌을  

       통칭하여 유염본)

     · 陳顯微解, 周易參同契解 3卷 (이하 진현미본)  · 儲華谷註, 周易參同契 3卷 (이하 저화곡본)

    주희의 참동계고이를 제외한 위의 참동계 판본들의 연대 사항을 살펴보자.

    먼저 앞의 인용문에서 원대에 유일하게 통행되고 있었다고 말해진 팽효본

    을 살펴보면, 팽효본은 정기가명경도 말미에 있는 글을 통해 그 성립시기를 알 수 있다. 정통도장 팽효본의 정기가명경도에는 편찬자 포중기(鮑仲祺)의 글과 원저자 팽효의 글이 함께 실려 있는데, 우리는 편찬자 포중기의 찬서

    (讚序)를 통해 정통도장에 실린 팽효본의 간행은 1208년(이하 포중기본),42) 원저자 팽효의 후서를 통해 팽효본 원본의 편찬은 947년43) 임을 알 수

    42) 정통도장본 정기가명경도「讚序」 뒷부분의 鮑仲祺가 기록한 부분을 살펴보면, 嘉定 元年(1208) 11월 5일에 建寧府建陽縣의 포중기가 쓴 발문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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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 팽효본에 대해 사고전서본의 「사고제요」에서는 “참동계에 주석을 한 모든 사람들은 이 팽효본을 최고본(最古本)으로 여기며, … 주자가 참동계고이를 만들 때, 그 장절을 팽효본을 따랐다. 영락대전에 기재된 참동계본 또한 전부 팽효본을 썼으며, 유염으로부터 제가(諸家)의 주석들이 그 아래에 나뉘어 붙어있다”44)고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참동계 주석서 가운데 오대 후촉의 팽효가 찬술한 분장통진의가 가장 오래된 주석서이며, 주희를 비롯한 송·원시대 주석본들이 모두 팽효본을 저본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래의 연구를 통해 사고전서 편찬자들의 말과 달리, 정통도장의 음장생본과 무명씨(용)본이 팽효의 참동계 판본보다 더 고본(古本)임이 밝혀졌다. 첸구오푸(陳國符)의 고증에 의하면, 음장생본 주석은 당대 경전인 을사점(乙巳占)을 인용하고 있으며, 무명씨(용)본 주석은 무도(武都), 진주(辰州), 금주(錦州) 등 당대의 특정 기간에 있었던 지명을 언급하고 있기에, 두 판

    본은 모두 당대(唐代) 주석본이 된다.45) 또 멍나이창(孟乃昌)에 따르면, 음장

    을 통해 알 수 있다. 발문에서 포중기는 민간에 저록된 판본들이 오류가

    있는 것과 탈락된 것이 많아 따르기가 어려우며, 주희가 正文을 교정한 것

    이 참됨을 얻어 의지할 만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분장통진의의 正文은 여러 판본을 참고하되 주희의 참동계고이를 대부분 따랐고, 팽효의 주석 문장은 鄭煥本을 따랐다고 말하고 있다.(周易參同契鼎器歌明鏡圖, 「讚序」, “今自秘館所藏, 民間所錄, 差誤衍脫, 莫知適從. 近者晦庵朱先生, 嘗隱名而爲之讎定, 考辨正文, 引證有理, 頗得其眞, 可以依據. 獨分章義解, 絶無善本. 臨安鄭煥所校, 自謂詳備, 而尤多舛誤. 其視經語, 每有不合. 較之他本,

    則文意稍連. 愚之試邑, 適當繁劇, 公餘得暇, 嘗取其書而讀之, 日覺有味, 因

    合衆本, 爲之校定. 其於正文, 多從晦庵之舊. 而通眞義解大略從鄭本. 其於衆

    本多同者, 亦自從衆 … 嘉定元年戊辰十一月五日, 辛丑冬至, 通直郎知建寧府建陽縣主管, 勸農公事借誹 鮑澣之仲祺謹書.”) 이로부터 정통도장의 팽효본은, 남송후기의 포중기가 正文은 주희의 참동계고이를 기준으로 하여 교감하여 정리하고, 주석문은 鄭本을 따라서 교감 정리한 주역참동계 판본으로서, 참동계고이가 완성된 후에 나온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이하에서 포중기가 1208년에 간행한 판본을 ‘鮑仲祺本’이라 약칭한다.

    43) 分章通眞義, “時孟蜀廣政十年, 歲次丁未九月八日, 昌利化飛鶴山眞二子彭曉序.”

    44) 四庫全書, 周易參同契分章通眞義·提要, “諸家註參同契者, 以此本爲最古, … 朱子作參同契考異, 其章次並從此本. 永樂大典所載參同契本, 亦全用曉書, 而以俞琰諸家之注, 分隸其下.”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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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본과 무명씨(용)본의 문장은 당대의 도교 서적에서 참동계를 인용한 문장과 동일하다.46) 이를 통해 음장생본과 무명씨(용)본은 당대판본으로서 현존하

    는 가장 이른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음장생본과 무명씨(용)본, 그리고 팽효본 외에 정통도장에 실린 무명씨(영)본, 유염본, 진현미본, 그리고 저화곡본은 모두 주희의 참동계고이 이후에 간행된 주석본들이다. 진현미본과 유염본은 서문에 간행 시기가 실려 있어,

    진현미본은 남송 단평(端平) 원년(元年)(1234)47), 유염본은 원대 지원(至元)

    갑신년(甲申年, 1284)48)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화곡본과 무명씨(영)

    본은 서문이 없어 정확한 간행시기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친웨이강의 고증에

    따르면 저화곡본은 주희의 참동계고이 바로 이후의 문헌이며, 무명씨(영)본은 남송 시대 주석본으로서 포중기본(1208) 이후의 문헌이다.49)

    이상에서 주희의 참동계고이 이전의 참동계 주석본은 팽효본 외에 당대본인 음장생본과 무명씨(용)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희는 음

    장생본과 무명씨(용)본, 그리고 팽효본을 모두 참고하여 참동계고이를 만들었을까. 주자어류나 회암집 등 현재 남아 있는 주희의 참동계 관련 글45) 陳國符, 「中國外丹黃白法經訣出世朝代考」(道藏源流續攷, 臺灣明文書局,

    1983), 377∼379쪽. 최근에 그간의 논문집을 모아서 낸 道藏硏究論文集의 「道藏經中外丹黃白法經訣出世朝代考」, 131~132쪽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46) 孟乃昌, 「周易參同契通考」(周易參同契考辯, 上海古籍出版社, 1993), 27~28쪽.

    47) 周易參同契解, 「序」, “先生, 名顯微, 宇宗道. 後隱以少微名, 准揚人也. 號抱一子. 有立聖篇及顯微居士一日, 并抱一子主日傳行于世云. 有宋端平改元夏五月朔旦, 金華洞元天璧壺道人鄭伯謙拜手謹敘.”

    48) 周易參同契發揮, 「自序」, “至元甲申四月十四日, 林屋山人全陽子俞玫玉吾自序.”

    49) 친웨이강에 따르면, 저화곡본은 다른 참동계 문헌에 비해 경문의 언어특징과 문자가 주희의 참동계고이와 가장 가까우며, 저화곡의 저서 袪疑說에서 ‘朱文公’이라는 주희의 시호가 등장하는 것을 통해, 저화곡본이 주희의 참동계고이 바로 이후의 문헌임을 알 수 있다. 또 무명씨(영)본의 경우, 남송중기에 발흥하여 유행한 麻衣易의 주석 문장들이 무명씨(영)본에 인용되어 있기에 이 주석본의 상한선은 南宋中期이며, 경문 문자

    가 분장통진의 鮑仲祺本과 가장 근접한 것을 통해 포중기가 교정 간행(1208)한 이후에 성립된 주석본이다. 欽偉剛, 朱熹與參同契文本(四川出版集團巴蜀書社, 2004), 6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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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는 자신이 참고한 참동계 판본을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아, 그가 참고한 저본이 무엇인지 명확히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원대 황서절이 팽효

    본만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말한 점과, 조공무(晁公武)가 남송 소흥 21년

    (1151) 전후로 완성한 도서목록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서 팽효본이 남송시기에 전해지고 있다고 한 점을 통해,50) 주희 당시에는 당대본이 널리 보

    급되지 않고 은밀히 도교 연단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당시 주희는 당대의 두 판본은 참고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며,51) 앞

    서 “주자가 참동계고이를 만들 때 그 장절을 팽효본을 쫓았다”는 사고전서 편찬자의 말처럼, 팽효본이 주희의 참동계 저본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참동계고이의 구조

    참동계고이의 구조와 그 특징을 살피는 것은 참동계고이 외의 다른 주석본과의 비교를 통해 가능하다. 이에 이 절에서는 주희를 비롯한 송대 이후

    주석가들이 저본으로 삼았다고 거론되는 팽효의 분장통진의와의 비교를 통해 참동계고이의 구조적 특징을 살핀다.

    50) 郡齋讀書志, 「後志卷二·神仙類」, “參同契三卷. 右漢魏伯陽撰. 按神仙傳, 伯陽㑹稽上虞人. 通貫詩律, 文辭贍博, 修眞養志, 約周易作此書, 凡九十篇. 徐氏箋注, 桓帝時, 以授同郡淳于叔通, 因行于世. 彭曉爲之解. 隋唐書目皆不

    載. 按唐陸德明解易字云, 虞翻注參同契, 言字從日下月. 今此書有日月爲易之

    文, 則其爲古書明矣.” 참고로, 수당시대 서목을 살펴보면 舊唐書「經籍志」에 “周易參同契二卷(魏伯陽撰). 周易五相類一卷(魏伯陽撰)”의 서목이 五行

    類에 포함되어 있다. 참동계가 별도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서목이 제시된 것은, 사고전서 편찬자의 말과 같이 남송 정초의 통지, 「예문략」으로 보인다.

    51) 정통도장에 실린 음장생본과 무명씨(용)본은 전체 참동계 구조, 장절의 분장, 그리고 경문 문자에 있어 주희의 참동계고이나 팽효본과 일정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무명씨(용)본의 경우는 현행본의 상권에 해당하는

    분량만이 실려 있을 뿐이다. 주해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데, 당대 두 판본은 모두 당대 외단의 영향 아래 외단의 입장에서 참동계 내용을 주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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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분장통진의의 구조

    우리는 앞서 팽효본 원본은 성립시기가 947년이지만, 정통도장에 실린 포중기본은 1208년에 간행된 판본이란 것을 살폈다. 포중기는 「찬서」에서 분장통진의의 정문(正文)은 여러 판본을 참고하되 주희의 참동계고이를 대부분 따랐고, 팽효의 주석 문장은 정환본(鄭煥本)을 따랐다고 말한다.52) 이에

    따르면 참동계고이 경문을 따른 포중기본을 가지고 참동계고이의 경문을 비교하는 것은 문헌상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경문 외에 포

    중기본 분장통진의의 구조 또한 원래의 구조와 차이가 나는 것일까? 우리는 분장통진의 서문에 나타난 팽효의 말을 통해 이를 판별할 수 있

    다. 

    (공에게) 전수해진 스승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공은) 고문용호경을 얻어서 그 오묘한 종지를 온전히 터득하였다. 이에 주역을 요약하여 참동계 3편을 지었다. 또 이르길 “미세한 뜻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해, 다시 보색유탈 1편을 지어 단경의 현묘한 뜻을 이어서 드러냈다.”고 하였다.53)

    지금 이에 장을 나누고 구를 정함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리가 서로

    달라붙고 의론이 합치하고 문장이 바르게 되며 나아가 약문(藥門)에 부합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때문에 4편을 총 3권으로 나누고 90장으로 만들

    어 양 구의 수에 응하게 하여, 이름하길 분장통진의라 하였다.54)

    위 첫 번째 인용문에서 팽효는 자신 이전의 참동계가 참동계 본문 3편과 보색유탈 1편을 더한 총 4편의 글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팽효는 참동계가 후대에 내려오면서 주해자에 따라 임의대로 문구(文句)를 나누거나 합

    52) 주석 44) 참조.

    53) 分章通眞義, 「序」, “不知師授誰氏, 得古文龍虎經, 盡獲妙旨. 乃約周易, 撰參同契三篇. 又云未盡纖微, 復作補塞遺脫一篇, 繼演丹經之玄奧.”

    54) 위의 책, “今乃分章定句, 所貴道理相黏, 合義正文, 及冀藥門附就. 故以四

    篇統分三卷, 爲九十章, 以應陽九之數, 名曰分章通眞義.”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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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본래 경문을 견강부회하는 문제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55) 그

    래서 그는 장구를 바르게 정하여 도교연단가의 의리에 부합되기를 바라는 마

    음에서, 기존의 4편을 통합한 후 총 3권 90장으로 만든 후 이를 분장통진의라 명명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총 3권을 상권 40장, 중권 38장, 하권 12

    장으로 분장하고, 더불어 하권에 따로 수일(水一)에 대응하는 「정기가」 1편을 두며, 이외 참동계를 요약한 「명경도결」 1편을 하권 말미에 덧붙인다고 말한다.56) 이러한 서문의 내용을 따른다면, 팽효 원본은 상·중·하 총 3권 90장,

    「정기가」 1편, 그리고 「명경도결」 1편이 덧붙여 있는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정통도장 포중기본의 구조를 살펴보면, 「정기가」와 「명경도결」은 정기가명경도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분장통진의와 독립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포중기본 분장통진의의 구조는 「서문」, 「상권」 40장, 「중권」 38장, 「하권」 12장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정기가명경도는 「정기가」, 「찬서」57), 「명경도결」 형태로 되어 있다. 분장통진의는 84장인 보색유탈장(補塞遺脫章)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글자들을 각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는데, 90장 가운데 「하권」 84장에서 87장까지의 내용은 「보색유탈」 4편이며, 88장부터 90장은 위백양의 자서에 해당된다. 정기가명경도에서 「정기가」와 「명경도결」은 각각 1편으로 따로 장절이 나눠져 있지 않다.

    팽효의 자서에 나타난 내용과 정통도장 포중기본을 비교하면, 포중기본에서 정기가명경도를 따로 분리하고 「찬서」를 덧붙인 것 외에는, 팽효의 자서에 나타난 상·중·하 총 3권 90장, 「정기가」 한 편, 「명경도결」 한 편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58) 팽효본의 자서에 나타난 구조와 현행 포중

    55) 위의 책, “蓋以假借爲宗, 上下无準, 文泛而道正, 事顯而言微, 後世議之, 各

    取所見, 或則分字而議, 或則合句而箋, 不無畎澮殊流, 因有妍媸互起.”56) 위의 책, “上卷分四十章, 中卷分三十八章, 下卷分十二章, 內有歌鼎器一

    篇, 謂其詞理鈎連, 字句零碎, 分章不得, 故獨存焉, 以應水一之數. 喻丹道陰陽之數備矣. 復自依約眞契, 撰明鏡圓訣一篇, 附于下卷之末, 將以重啟眞契之戶牖也.”

    57) 「讚序」의 앞부분은 위백양의 글을 가탁한 것으로 팽효는 보고 있으며, 주희는 ‘徐從事’의 글로 추측한다. 그리고 뒷부분은 팽효의 분장통진의 판본을 편집한 鯆仲祺의 讚序가 함께 있다.

    58) 정통도장본 이후에 나온 간행본인 四庫全書本을 살펴보면, 사고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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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의 구조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볼 때, 팽효본 원본의 구조는 자

    서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남송 주희가 저본으로 삼았던 팽

    효본의 구조는 상·중·하 3권 90장, 하권에 「정기가」 한 편, 「명경도결」 한 편을 포함하는 구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 참동계고이의 구조

    앞서 보았듯이 현재 통행하는 참동계고이본은 원대 황서절이 판각한 것으로서, 채연본의 원래 형태는 알기 어려우며 경문과 주석 상에서 글자의 출

    입(出入)과 동이(同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행 통행본을 살펴보면, 황서

    절은 머리말과 본문 주석에서 주희의 글 외에 별도로 주희의 문집에서 참동계와 관련된 구절을 뽑아서 첨가하였으며, 설명이 필요하다고 보이는 곳에서는 자신의 말을 직접 덧붙였다. 이렇듯 황서절이 주희의 글과 자신의 말을 덧

    붙인 곳 외에, 필자는 기본적인 구조에 있어서는 팽효 원본과 포중기본과 마

    찬가지로 원대 주자성서본과 채연본 역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논의를 진행한다. 더불어 현행 정통도장본 참동계고이는 원대 주자성서본과 권수에서 3권 3편, 1권 3편 체제를 지닌다는 것과 ‘고이’의 명칭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있을 뿐, 그 외의 구조적인 차이는 발견되지 않기에

    이하에서는 정통도장본을 기준으로 참동계고이의 구조를 살핀다.참동계고이의 구조는 서(序)에 해당하는 부분, 본문의 상·중·하 3권 3편

    (혹은 1권 3편), 하편 다음의 「오상류」, 「정기가」, 「찬서」로 구성되어 있다. 정통도장본 참동계고이를 포중기본이 아닌 팽효원본 및 타 판본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59)

    본은 정기가명경도라는 구별 없이 「하권」에 바로 「정기가」 1편과 「명경도결」 1편이 실려 있으며 정기가명경도에 있는 「찬서」가 없다. 때문에 사고전서본이 팽효가 서문에서 말한 원래 모습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59) 아래 주석본들은 팽효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통도장본이다. 다른 판본과의 구조를 비교해 볼 때, 팽효본은 포중기본이 아닌 원본 구조를 보여주

    는 낫다고 보았다.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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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본 무명씨(용)본 팽효 원본 주희 유염본 진현미본

    序 序 序 序 序 敍

    上卷 上卷·下卷 上卷 1∼40 上卷(上篇) 卷1(上1)∼卷4(上4) 上卷(上篇)

    中卷 - 中卷 41∼78 中卷(中篇) 卷5(中1)∼卷7(中3) 中卷(中篇)

    下卷

    (鼎器歌)-

    下卷

    79∼90

    79∼83

    下卷

    下篇 卷8(下篇1)

    下卷下篇84∼87

    五相類卷9

    下篇288∼90

    鼎器歌·明鏡圖訣 鼎器歌·讚序 鼎器歌·序·讚序 鼎器歌

    [표] 각 주석본들의 경문 구조 비교

    분장통진의와 참동계고이를 비교해 보면, 상·중·하 체제는 동일하되 장절과 의미단락의 구분은 차이가 있다. 팽효는 각 장절에 제목과 번호를 붙여

    서 90장으로 나눈 반면 주희는 각 장절에 제목과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더불

    어 팽효가 하권에 ‘보색유탈’ 4장(84∼87)을 포함시키고 말미에 「정기가」·「찬서」·「명경도결」를 둔 반면, 주희는 ‘보색유탈’ 장과 위백양의 자서부분에 해당하는 3편(88∼90)을 「오상류」로 한데 모아서 「하편」 뒤에 싣고 있다. 그리고 팽효가 작성한 「명경도결」은 빼고 「정기가」와 「찬서」를 두고 있다. 여기서 팽효본에 보이지 않는 ‘오상류’라는 편장 명칭이 참동계고이에 보이는데, 이는 주희가 참동계 경문의 “그래서 다시 이편(보색유탈)을 지어 오상류로 명명하니, 대역(大易)의 성정(性情)을 다하였다.”60)는 내용을 참조하여, 팽효의

    ‘보색유탈’이라는 명칭 대신 ‘오상류’라는 명칭을 써서 편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대 이후 참동계 판본을 볼 때, 참동계의 기본 틀은 처음 서문이 나오고, 본문은 상·중·하 3권(혹은 3편) 체제를 지니며, 이후 하권(하편) 말미에는 「정기가」를 두는 구조를 지닌다. 분장통진의와 참동계고이를 비교해보면, 팽효는 기본 구조에 「명경도결」이라는 자신의 이해를 덧붙인 반면, 주희는 팽효의 「명경도결」을 없애고 하편의

    60) 分章通眞義, 「補塞遺脫章第八十四」, “故復作此, 命五相類, 則大易之情性盡矣.”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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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장을 「오상류」라는 명칭으로 묶었다는 특징을 보인다.

    4. 결론

    현행 참동계고이의 뒷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황서절의 말이 덧붙여 있다.

    추흔(鄒訢)이란 두 글자는 주자가 그것을 빌어서 이름을 가탁한 것이

    다. 추(鄒)는 본래 춘추에서 주자(邾子)의 나라를 가르킨다. 악기(樂記)의 ‘천지흔합(天地訢合)’에 대해 정씨(鄭氏)가 주석에서 말하길, “흔(訢)이란 마땅히 희(熹)라고 써야한다.”고 하였다.61)

    참동계고이의 마지막 발문에는 저술자 명칭으로 ‘공동도사(空同道士), 추흔(鄒訢)’이 적혀있다.62) 위 인용문의 황서절의 말은 ‘공동도사, 추흔’이란 명

    칭은 바로 주희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사용한 것으로, ‘추흔’은

    ‘주희(朱熹)’란 이름의 은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주희가 이렇게 가명을 쓴

    것에 대하여, 사고전서 편찬자는 “아마도 심단결(心丹訣)을 궁구하는 것은 유학자의 본래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숨기고 가탁한 것일 것이

    다”63)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주희가 도학자로서의 입장을 숨기기 위해 은

    어를 사용한 것일까.

    주희는 역학계몽이 완성된 1186년(57세) 즈음부터 참동계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1196년에 초고 형태를 완성한다. 그리고 1197년 말엽에서

    1198년 초엽 사이에 채연으로 하여금 참동계고이를 간행케 한 이후, 다시 재수정 작업을 거쳐 1199년에 참동계고이 정본을 간행한다. 채원정·채연 61) 參同契考異, “鄒訢二字, 朱子借之託名也. 鄒, 本春秋邾子之國. 樂記

    天地訢合. 鄭氏註云, 訢當作熹.” ‘訢當作熹’의 ‘熹’는 正統道藏本에는 ‘喜’로 되어 있다. 하지만 四庫全書本과 朱子全書本에는 ‘熹’로 쓰고 있기에, 두 판본에 ‘熹’로 기재한다.

    62) 參同契考異, “右周易參同契, 魏伯陽所作. 魏君, 後漢人. 篇題蓋放緯書之目, 詞韻皆古, 奧雅難通. 讀者淺聞, 妄輒更改, 故比他書尤多舛誤. 今合諸

    本更相讎正, 其間尙多疑晦, 未能盡祛, 姑據所知, 寫成定本. 其諸同異, 因悉

    存之, 以備參訂云. 空同道士鄒訢.”

    63) 參同契考異, “殆以究心丹訣, 非儒者之本務, 故託諸廋詞歟.”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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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와 삼자 협업하면서 1196년부터 1199년까지 여러 참동계 판본과 비교·대조를 통해 참동계고이를 완성하는 3년의 기간 동안, 주희는 다른 문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자신이 참동계고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만약 주희가 자신이 도교 문헌인 참동계를 주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자 했다면, 그는 아마 서신을 통해 자신이 참동계고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남송대의 여러 참동계 판본을 두루 살피고 두어 차례 교정을 거쳐 완성한 저술을 주희가 굳이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필자는 도학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숨기기 위해 주희가 은어를 사용하였다

    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참동계고이 경문과 주석 특징, 그리고 참동계고이와 주희의 사유체계의 연관성 등을 더욱 세밀히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참동계고이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의 바탕 하에서 우리는 주희의 저술 의도를 잡아낼 수 있을 것이며, 더불어 주희가 ‘공동도사, 추

    흔’이란 명칭을 사용한 이유 역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참동계고이에 관한 심도있는 연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술시기와 판본, 그리고 구조 등을 다룸으로써 국내 참동계고이 연구의 토대를 다지고자 하였다. 본 글은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한 참동계고이 연구의 토대작업으로서 다소 지루하고 딱딱한 글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향후 좀 더 심도 있

    는 참동계고이 연구를 기약한다.

    논문제출: 5월 27일, 심사마감: 6월 22일, 게재결정: 6월 22일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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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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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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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동계고이의 편찬과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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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泰東古典硏究 第30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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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The publication and structure of Chantong qi kaoyi

    Lee Dae-seung

    This thesis is a foundation research for an in-depth study for

    Chantong qi kaoyi (參同契考異) of Zhu Xi and aims to examine the

    publication and structure of Chantong qi kaoyi.

    Zhu Xi was already interested in Zhouyi cantong qi (周易參同契) by

    1186, his 57 years of age. He started to write Chantong qi kaoyi

    through a cooperation with Cai Yuanding (蔡元定) in 1196 and made Cai

    Yuan (蔡淵) publish the first version of Chantong qi kaoyi between end

    of 1197 and beginning of 1198. He published the formal edition of

    Chantong qi kaoyi in the spring of 1199 through an amending work with

    Cai Yuan. The edition of Cai Yuan does not pass on these days, and the

    current edition is the edition of Huang Ruijie (黃瑞節) on Yuan (元)

    dynasty, which is a little bit different with the edition of Cai Yuan.

    Chantong qi kaoyi was made by the comparative study with other

    Zhouyi cantong qi editions on the basis of Cantong qi fenzhang tong

    zhenyi (參同契分章通眞義) of Peng Xiao (彭曉). The structure of

    Chantong qi kaoyi is generally similar with the other editions of Zhouyi

    cantong qi.

    Key words : Zhu Xi, Cantong qi kaoyi, Zhouyi cantong qi, Peng Xiao,

    Cantong qi fenzhang tong zhenyi